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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사고 수습 지원단 최선영입니다. (1주차/ 2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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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영 작성일16-07-18 11:50 조회13,3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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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으로 ‘세월호 침몰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던 건 언젠가 가족과 함께 뉴스를 시청했을 때이다. 나는 평소 뉴스를 잘 챙겨보지 않는데, 티비를 틀고 채널을 돌려보고 있을 때 세월호 사고 내용이 나오는 것을 우연히 보게된 것이다. 연속적으로 흘러나오는 세월호 보도를 집중해서 볼 수밖에 없었다. 보는 내내 마음을 졸이며 긴장 했었는데, 세월호를 타고 떠났던 사람들 전원이 구조 되었다는 속보에 한숨을 내쉬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사건이 터지고 얼마 후, 나는 충격을 받고 아무것에도 집중을 할 수 없었다. 며칠이 지나고 핸드폰을 확인하자 네이버 메인에는 사망자와 실종자 수가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수가 급속도로 증가하는 것을 봤고 그제서야 언론에 비춰지는 세월호 얘기는 온통 거짓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몇 달 동안은 축 쳐진 기분으로 학교를 다녀야만 했다. 반에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은 모두 검은 양복 차림이셨고 반 분위기는 매우 엄숙하였다. 그 때문인지 세월호 얘기를 꺼내는 것도 무척이나 힘들어보이셨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차마 먼저 꺼내기는 힘든 그런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찮게 한 학생이 펑펑 울면서 친구와 얘기하는 것을  듣게 되었는데 교감선생님께서 자살하셨다는 것이었다. 알고보니 우리 학교(양지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셨던 분이 단원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하셨었고, 제자를 두고 구조 되었다는 죄책감에 목숨을 끊으셨던 것이다. 나는 엄청난 오열을 하고 한동안은 유튜브에 올라오는 사연이 담긴 동영상들을 보고, 추모곡들을 들으며 한없이 울기만 했다. 하지만 며칠 동안을 이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눈물만 쏟아내면서 그들을 걱정한다고 한들, 움직이지 않으니 아무런 변화가 없고 내 자신이 점점 더 초췌해지고 우울해져 가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것보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직접적으로 도와드리는 것이 그들에게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가족끼리 합동분향소를 찾아 진상규명 촉구를 위한 서명운동을 했다. 사방에는 온통 노란리본이 묶여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다. 안으로 들어가보니 그곳은 영정사진으로 가득했고 슬픔으로 물들어있었다. 또한 국화꽃을 놓는 곳에는 그들이 좋아했던 음식과 인형, 개인 사진 등으로 꽉 차있었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마음 한켠이 미어졌다. 아는 사람 한 명 없었지만 쏟아지는 눈물을 차마 그칠 수 없었다. 이렇게 합동분향소 방문을 마지막으로 한 뒤,  평범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고 산지 2년, 안산시에서 대학생 하계 아르바이트를 모집 했다. 나는 무슨 부서가 있는지 둘러보던 중 분향소 내 세월호 참사 기록물 정리가 있는 것을 보았고 그 즉시 바로 신청 했다. 그들에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고 보다 뜻깊은 방학을 보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나는 당첨 문자를 받았고 생애 처음으로 하는 아르바이트를 이 곳에서 할 수 있게 되어서 한 달동안 매우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대학생 시청 아르바이트를 신청할 때는 말 그대로 시청 안에서 일하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7월 4일 월요일에 한달 동안 일할 부서가 나뉘어질 때 학과에 따라 조정되어 몇명 안되는 학생들은 근무지가 시청으로 배치되었고 나머지 학생들은 화랑유원지 합동분향소로 배치되었다. 그 후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했는데 마음이 쓰리도록 인상 깊었던 것은 분향소로 들어간 후 하늘의 별이된 학생들과 선생님, 시민들의 얼굴을 보면서 국화꽃을 앞에 둔 것이었고, 그 후 사무국장님께서 당시 2학년 1반, 2반과 같이 학생들의 반을 언급 하시면서 몇명이 살아돌아왔는지를 말씀해주셨던 것이다. 빠져나오려고 할 때 얼마나 그 상황이 힘들었을지 상상이 되었다. 나는 울컥한 마음을 조용히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나서 7월5일 화요일에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맡게된 부서는 '분향소 내 추모기록물 정리'였고 일할 인원 2명이 필요했다. 광화문, 학교, 팽목 등에서 오는 추모 기록물에 식별번호를 붙여 정리하는 일과 마구잡이인 상태로 한 곳에 들어있는 긴 현수막들을 차곡차곡 접어서 쌓아올려야하는 일을 맡게 되다보니 같이 일 하는 학생과의 팀워크가 중요했다. 이 일들을 수행할 때 담당자 선생님께서 친절하시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같이 고민하고 잘 알려주셔서 부담없는 분위기에서 일할 수 있는 것이 만족스러웠다. 7월 6일 목요일부터는 노트북으로 수집한 자료들 하나씩 개요목록을 작성하는 업무를 시작했다. 상자번호(B1, B2 등), 식별번호(B1-001, B1-002 등), 수집일자, 생산일자, 수집처, 관련활동(1주기, 2주기 등), 기록내용, 기록유형, 수집규모, 기증자, 연락처, 작성일시, 작성자, 비고를 적는 것이다. 즉 수집기록정보, 출처정보, 작성자정보를 써야 비로소 한 상자 안에 들어있는4.16 세월호 참사 수집 및 기증 기록 목록 작성이 완성되는 것이다. 기록물 중 그림으로 오는 것이 있는데 그 그림들에 담겨진 의미를 해석할 때마다 세월호 사고 희생자들이 안타깝고 안쓰럽게 느껴졌다. 또한 일 하는 근무지 근처에 희생자분들의 얼굴과 사연이 적혀 있는 현수막이 걸려져 있는데 그 내용들을 읽어갈 때마다 마음이 뭉클했다. 그렇게 기록물 정리는 계속되고 7월14일 목요일에 '세월호와 문화' 강연을 들었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세월호 참사 사건은 '기억문화'를 '행동문화'로 바꿀 수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3시에 시작한 이 교육은 1시간 30분동안 이어졌고, 5시까지 남은 30분동안 어머니와 아버지가 계신 공방에 가서 노란리본 꿰매는 작업을 도와드렸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갑자기 "자신없으면 수학여행 가지말지...그치?" "무서워서 어떻게 바다에 뛰어들어...그치?"라는 얘기를 꺼내셨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하면서 어떤 말을 건내드려야 할지 몰랐다. 그리고나서 "이런 상황에서 뭘 해야할지... 화만나"라고 하셨다. '내가 만약 그들의 부모님이었다면...' 하는 감정 이입과 동시에 그 말씀을 공감할 수 있었고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 쓰셔서 어머니의 눈을 제대로 볼 순 없었지만 아래로 축 내려간 입모양을 보고 슬픈 표정을 짓고 계시고 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들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불미스러운 사고에 의한 영혼들의 몫까지 남은 기간동안 그 분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하고 있는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다지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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